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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황제 고종의 돌연사는 독살일까?

by richangel215 2025. 2. 16.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조선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사건 중 하나다. 1919년 1월, 별다른 병세 없이 세상을 떠난 그는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특히, 커피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증언과 일본의 부검 거부는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의 죽음은 3.1 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며, 독립운동의 흐름을 가속화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건의 진실은 베일에 싸여 있다. 과연 고종은 자연사했을까, 아니면 일본의 치밀한 계획에 희생된 걸까?

 

1.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1907년, 일본의 압력으로 퇴위당한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경복궁 내 함녕전에서 갑작스럽게 서거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7세였으며,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별다른 보고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두고 단순한 노환이 아닌 타살설이 제기되면서, 조선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사건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즉위한 후에도 고종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고, 그가 사망한 시기는 3.1 운동을 불과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기에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경복궁
경복궁

 

2. 일본 독살설, 근거는 무엇인가?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 원인으로 가장 유력하게 제기된 가설은 일본의 독살설이다. 그의 죽음 직후 조선 내에서는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특히,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을 경계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고종의 존재 자체가 일본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고종이 마신 커피에 독이 들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시 경복궁에서 고종을 모셨던 궁녀들 사이에서도 "마지막으로 커피를 드신 후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증언이 나왔다. 조선총독부가 사망 직후 시신 부검을 강력히 반대했던 점도 의혹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고종이 사망하기 전,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조선 황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일본은 조선 왕실의 동향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으며, 황실 내부의 주요 인물들 역시 일본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이 독립운동과 연계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고종을 정치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무력화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더불어, 고종의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로는 독극물 중독 증상을 보였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고종을 모셨던 인물들은 그가 사망 직전 안색이 급격히 변하고, 호흡이 가빠지며, 갑작스럽게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여러 독극물 중 특히 비소 계열의 독극물 중독 증상과 유사하다는 분석이 있다. 일본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정치적 암살을 실행한 사례도 주목해야 한다. 일본은 1910년대부터 조선 내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표적으로 삼았으며, 독살과 같은 은밀한 방법을 사용한 사례가 보고되었다. 대표적으로,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 역시 일본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안중근 의사 역시 일본의 감시하에 사형당했다. 이러한 전례를 볼 때, 고종의 죽음 역시 일본의 체계적인 정치적 암살의 일환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일본이 조선에서 사용한 독극물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일본은 군사 및 정치적 목적으로 독극물을 활용한 사례가 있으며, 당시 일본의 의학 및 화학 연구소에서는 다양한 독극물 실험이 진행되었다. 일부 문헌에서는 일본이 특정 독극물을 사용하여 암살을 진행했으며, 이를 이용해 고종에게 치명적인 독을 투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3. 고종의 부검 거부와 진실의 은폐

고종의 사망 후, 독살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부검이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대한제국의 황실과 조선인들은 부검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일본 당국은 "고종의 유해를 훼손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이를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고종의 정확한 사인은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고, 이는 독살설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들었다. 특히,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과 관련된 기록을 체계적으로 폐기하거나 조작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고종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의도적으로 은폐되었을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황실의 역사적 기록을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연구자들은 고종 사망과 관련된 중요한 문서들이 의도적으로 파기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고종의 장례식 이후에도 일본은 황실 내부의 의사 결정권을 제한하며 대한제국의 역사적 흔적을 지우려 했다. 대한제국 황실이 일본의 통치에 반발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일본은 고종의 죽음을 기점으로 조선 황실의 입지를 더욱 축소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4. 3.1 운동과의 연관성

고종의 죽음은 조선 민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이는 곧 3.1 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이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이는 조선인의 반일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 지도자들은 고종의 장례식이 열린 3월 1일을 거사일로 삼아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특히,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고종의 죽음이 단순한 노환이 아니라 일본의 계획적인 음모였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3.1 운동의 대규모 시위에 불을 붙였다. 조선 각지에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거세졌으며, 이는 이후 조선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5.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들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대한제국 황실 관련 문서들이 대부분 일본에 의해 소각되거나 조작되었고, 공식적인 사망 기록조차 명확하지 않아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했을 때, 단순한 병사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역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되고 있으며, 언젠가 고종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일본의 정치적 개입과 암살의 가능성은 여전히 연구되고 있으며, 후대의 연구자들이 새로운 증거를 발굴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