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는 신이 대홍수에서 노아와 생물을 구하기 위해 만든 배로, 인류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방주의 실제 흔적을 찾으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등 다양한 신화에서 대홍수 이야기가 등장하며, 최근엔 흑해 범람설이 주목받고 있다. 미국 과학자들은 기원전 6000년경 흑해에 대규모 홍수가 발생했으며, 이 사건이 대홍수 신화의 기원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는 오늘날 탐사로 계속 검증 중이다.
1. 노아의 방주와 신의 서약
전 세계를 물에 잠기게 했다는 대홍수 이야기는 창세기 6~9장에 나온다. 신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자신의 피조물을 파멸시키기로 결정했을 때 노아는 올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홀로 살아남았다. 신은 노아에게 배(흔히 방주라고 부른다)를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일러주었다. 박공벽으로 지붕을 올리고 작은 방들이 많은 기다란 집과 같은 배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노아는 식솔들과 함께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을 한 쌍씩 데리고 배에 올랐다. 한동안 모든 땅의 표면이 물에 잠길 정도였으나 결국 비가 그치면서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방주가 아라라트 산에 이르자 노아는 방주에서 내려도 좋은지 알아보기 위해 새들을 내보냈다. 먼저 까마귀를 보낸 다음 비둘기를 세 차례 날려 보냈다. 마지막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노아는 땅이 말라 배에서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륙한 다음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신은 제사를 받아들이고 다시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세상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신은 노아와 서약을 맺고 그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을 내렸다. 서약에 따라 인간은 지상의 모든 생물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으며, 신은 하늘에 무지개를 걸었다.
2. 노아의 방주를 찾아서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가 닿은 산이 어디인지 찾으려 애썼다. 최근에도 그 흔적을 찾기 위해 많은 탐험이 있었으나 근동에는 후보가 될 만한 산이 워낙 많다. 그중 하나는 이라크(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키르쿠크 부근에 있는, 과거에 니시르 산이라 불리던 피르오마르구드룬인데, 옛 아시리아의 발흥지였던 자그로스 산맥의 동쪽에 있는 산이다. 또 다른 후보는 아르메니아의 타우루스 산맥 동쪽에 있는 반 호수다. 아시리아 제국(기원전 9~7세기)의 시대에 이곳은 우라르투(성서에 나오는 아라라트와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하라) 왕국이었다. 이 산맥의 최고봉인 마시스 산이나 반 호수 남동쪽의 쿠르드 산맥에도 여러 차례 탐험대가 가서 노아의 방주를 찾았다. 그러나 이따금 낙관적인 소식이 있었지만 방주는 찾지 못했다. 창세기의 노아 이야기는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고 신화에 불과했으므로 그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신이 숭배자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한다는 설정에서 보듯이 그 신화는 초기의 소박한 신의 개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신은 전능한 유일신의 모습을 취하지만, 인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시 근동의 여느 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3. 대홍수의 흔적을 찾아서
대홍수가 있었고 거기서 살아남은 영웅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왔다는 전설은 남아메리카에서 오스트랄라시아, 지중해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기까지 고대의 수많은 신화들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그 영웅은 데우칼리온이었다. 노아와 마찬가지로 그와 그의 아내는 방주를 만들어 짐승들을 싣고 파멸을 면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대홍수의 영웅이 지우수드라, 아트라하시스, 우트나피시팀 등 시대마다 달랐다.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노아 이야기와 가장 유사한 것은 이 메소포타미아 전설이다. 1873년에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는 우루크의 신화적 왕인 길가메시가 친한 친구 엔키두와 함께 여러 가지 모험을 겪는 서사시를 출판했다. 엔키두가 죽자 길가메시는 절망에 빠져 영생의 비밀을 찾기 위해 떠난다. 그는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아내와 함께 신들로부터 영생을 선사받은 자기 조상 우트나피시팀을 만난다. 우트나피시팀은 길가메시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는데, 유일신이 아니라는 것만 빼고는 성서에 나오는 노아와 방주 이야기와 거의 흡사한 내용이다. 1920년대에 영국의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는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 족장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도시 우르를 발굴했다. 울리는 우르에서 대홍수의 증거를 발견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런던에 타전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실패했고 이후에 메소포타미아 평원 남부의 다른 유적을 발굴한 고고학자들도 홍수의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도기, 무덤, 건물 등 주거지의 흔적이 포함된 두터운 침니층이었는데, '대홍수' 층의 아래와 위에 모두 있었다. 그러나 이 침니층은 유적지 전역이 아니라 주거지의 특별한 지역에만 있다. 대홍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메르와 아카드를 흐르는 큰 강들인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국지적 범람을 말해주는 증거인 것은 분명하다.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도시들은 부득이 그 두 강의 지류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두 강은 주거지에 생명도 살 수 있게 했지만 홍수의 위험도 가져왔다. 터키나 시리아의 상류에서 큰 홍수가 일어나거나, 산악지대에서 겨울의 눈이 너무 빨리 녹는다면, 불어난 강물은 금세 급류가 되어 둑을 무너뜨리고 비교적 좁은 지역에 막심한 피해를 주었다. 하류 지역에서는 이런 일이 더 쉽게 일어날 수 있다. 강물이 천천히 흘러 범람원으로 넘칠뿐더러 강둑(하상을 높인 부분)보다 강물이 밀려드는 비옥한 들판이 더 낮기 때문이다. 홍수의 흔적은 그런 환경에서만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유적지들이 있는 남부는 현재 사막이 되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강물의 경로가 몇 차례나 바뀌어 삼각주의 위치가 달라진 것이다.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은 오래전부터 노아의 홍수는 그런 잦은 홍수 가운데 특별히 대규모였던 경우가 민간의 기억에 남은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 기억은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멀리 여행한 아브라함의 씨족에게 전승되었고, 그들이 새로 정착한 땅에서 새로 유일신의 색채가 입혀졌을 것이다. 창세기의 이야기에 내재된 구술 전설은 수세기를 거치면서 노련한 이야기꾼들을 통해 전해졌을 것이다. 성서의 맥락이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점으로 볼 때 상세한 부분까지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4. 흑해의 범람?
그런데 흑해에 각별한 관심을 품은 미국의 지구물리학자 윌리엄 라이언과 월터 피트먼은 흥미로운 새 이론을 내놓았다. 그들은 대홍수가 기원전 6000년경 흑해에서 실제로 일어난 대격변이라고 본다. 당시 흑해는 현대의 지질학자들이 뉴에우크시네 호수라고 부르는 담수호였으며, 수심은 해수면보다 150미터 정도 더 깊었다. 빙하시대 끝 무렵에 빙하가 녹으면서 전 세계의 해수면이 상승했다. 지중해(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대서양의 물이 들어온다)의 바닷물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마르마라 해로 밀려들어왔다. 동쪽 끝에서 뻗어 나온 지협이 뉴에우크시네로 가는 물길을 차단했지만, 해수면이 계속 상승하면서 처음에 천천히 흘러들어오던 물은 점차 빨라졌다. 그 뒤, 아마 터키에서 흔히 발생하는 지진으로 인해 지협은 쪼개지고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오늘날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덮치면서 동쪽으로 계속 흘러가서 아래쪽의 호수로 밀려 들어갔을 것이다. 라이언과 피트먼은 매일 약 10세제곱 마일의 물이 2년 동안 서쪽에서 동쪽으로 좁은 해협을 지나갔으리라고 추정한다. 그 과정에서 흑해의 바닥도 깎여나갔지만, 그래도 흑해 전체의 수면은 매일 15센티미터씩 상승했고, 호수 주변의 평원은 하루에 1마일씩 물에 잠겼다. 근동 전 지역이 그랬듯이 당시 호수 주변에도 분명히 농경을 하는 촌락들이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어나는 호수를 피해 가축들과 함께 배나 당나귀를 타고, 혹은 급할 경우에는 걸어서 달아날 수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은 그 끔찍한 대홍수의 기억을 널리 퍼뜨렸다. 이 기억들은 점차 전설과 신화가 되어 누대에 걸쳐 시인들과 보통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와 노래로 전송되었다. 이 이론은 현재 카메라가 장착된 원격 조종 잠수정으로 흑해의 바닥을 조사하는 방식을 통해 검증되고 있는 중이다. 카메라가 보내온 사진들을 탐사선 위에서 볼 수 있는데, 놀랍게도 첫 결과물은 대단히 흥미롭다. 수심 91미터에서 건물의 잔해로 보이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앞으로 더 깊은 곳까지 조사될 예정이다. 두 미국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이 대홍수 전설의 기원이라고 한다. 노아의 이야기는 그 대홍수에 관한 하나의 기억이고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는 둘째, 그리스의 데우칼리온 전설은 셋째에 해당한다. 이 전설은 명확하게 증명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해 버리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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