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묘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다는 믿음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대주교 마카리오스에게 예수의 무덤을 찾으라 명했고, 그는 곧바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신전을 허물었다. 그곳에서 발견된 무덤은 과연 예수의 것일까? 복음서와 고고학적 증거가 교차하는 가운데, 무덤의 진위 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수세기 동안 파괴와 복원을 거듭한 이 성지는 과연 기적의 증거일까, 전설이 만들어낸 성지일까?
1.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성묘교회 한복판에 그리스도의 진짜 무덤이 있다고 굳게 확신한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이교도의 도시였던 200여 년 동안 예수의 매장터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 황제로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국가종교로 선포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그는 예루살렘 대주교 마카리오스에게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 그곳에 커다란 교회를 세우라고 명했다. 대주교는 어떻게 찾아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주저 없이 200년 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거대한 로마 신전을 허물었던 것이다. 신전의 토대에서 발굴자들은 한 무덤을 발견하고 이구동성으로 그 무덤은 바로 아리마대의 요셉이 300년 전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황급히 묻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진정 신의 손길이 인도한 기적일까, 아니면 전해지던 전설에 따라 마카리오스가 곧장 그 무덤으로 간 걸까?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2. 복음서의 전통
복음서에 따르면 로마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곳은 예루살렘 성벽 부근의 처형장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시민들은 범죄자들이 처형되는 광경을 잘 볼 수 있었다. 도시의 북서쪽 모퉁이 바로 너머에는 지금도 예루살렘의 건물들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는 단단한 '말라기' 석회암의 채석장이 있다. 이 채석장은 기원전 8~7세기에 발견되었으며, 예수의 시대에는 주변에 정원과 과수원들이 있었다. 채석장의 한 지점에는 석공들이 건축재로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버려 둔 결함 있는 바위가 하나 있다. 이 바위를 사람들은 예수가 두 도적 사이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갈보리 혹은 골고다(해골의 언덕)라고 생각한다. 인근에는 예루살렘의 부유한 시민들이 채석장 벽의 단단한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들이 있다. 아리마대의 요셉의 무덤은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마태복음(27:57~60)에 나오는 것처럼 도시 성벽 바로 너머의 공개 처형장 부근이다. 복음서는 또한 무덤의 입구가 맷돌 모양의 크고 무거운 돌로 막혔다고 말하는데,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 일대에서 예수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그런 무덤을 몇 군데 발견했다. 그것들은 아마 귀족 가문들의 무덤일 것이다. 그들은 몇 대에 걸쳐 가문의 시신들을 매장하고 입구를 크고 둥근 돌로 막아놓았다. 마태복음에서 설명하듯이 이런 돌을 움직이려면 큰 힘이 필요했다. 당시의 유대법 관례에 따르면 시신을 매장하기 전에 씻고 기름을 바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다음에는 시신을 수의로 감싸고 무덤 한켠의 바위를 깎아 만든 단 위에 안치했다. 그리스도의 시신을 씻고 기름을 바르는 일을 했던 여인들은 안식일 다음날 이른 시각에 무덤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이 기적적으로 치워지고 단 위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3. 로마 지배기의 예루살렘
오랫동안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도들은 그 장소를 숭배했다. 그러나 기원후 2세기 초반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식민 시를 세웠다. 135년경에 그는 높은 단 위에 커다란 신전 건물을 짓고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게 봉헌했다. 아마 당시에는 황제의 신전이 세워진 그곳이 무덤의 자리이며 십자가 처형이 있었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졌을 것이다. 395년경에 쓴 책에서 히에로니무스는 인근의 갈보리 바위에 커다란 여신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말한다. 후대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자신들이 그 신성한 장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드리아누스가 신전을 세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황제는 이 새 도시에서 그리스도교도와 유대인이 자신들의 신앙을 섬기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소수의 그리스도교도들은 로마 시대 내내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았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의 처형지와 매장지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을 무렵 예루살렘의 규모와 성벽의 범위는 300년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물론 무덤의 대략적인 위치는 전설로 전해지지만, 이교가 지배하던 로마 시대에 살아남은 일부 그리스도교도들이 그리스도가 묻힌 곳을 정확히 알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마카리오스 대주교는 도시 성벽 너머로는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단번에 하드리아누스가 세운 도시 한복판 광장의 북쪽에 있는 로마 신전으로 향했다. 예수가 처형되던 시기에 이 지역은 실제로 도시 외부에 있었으며, 예수의 사후 10~15년쯤 지나 도시의 일부로 편입된 곳이었다.
4. 무덤 찾기
무덤의 위치에 관한 목격담은 한 가지가 전해진다. 337년경에 카이사리아의 주교이자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는 늙은 나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전기를 썼다. 그에 따르면 발굴자들은 그리스도의 무덤이 그렇게 찾기 쉬운 데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 일대의 많은 무덤들 중에 바로 그 무덤을 제대로 찾은 걸까? 아니면 그냥 어떤 무덤을 찾아내고 그것이 그 무덤이라고 추측한 걸까? 유세비우스나 후대의 문헌들에도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마 거기에는 예수의 이름이 씌어 있다든가 하는 표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옥스퍼드 하트퍼드 대학의 마틴 비들은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의 높은 제단 아래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어쨌든 예루살렘에 세워진 당대 최대 규모의 마르티리온 교회는 오늘날 성묘교회의 전신에 해당한다. 이 교회의 건너편, 신성한 정원의 맞은편에는 주변의 바위를 모두 지면과 같은 높이로 깎아내서 홀로 서 있는 무덤이 하나 있었다. 335년에 교회를 봉헌하고 얼마 뒤에 콘스탄티누스는 그 바위 무덤에 에디쿨러(작은 집)라는 작은 사당을 짓고, 커다란 로툰다(아나스타시스, 즉 '부활'로 불렸다)를 씌운 다음 그 전체를 거대한 돔으로 덮었다. 현재 무덤을 덮고 있는 에디쿨레는 세 번째로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것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무덤이라 하더라도 한 가지 미스터리는 여전히 남는다. 원래의 무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의 에디쿨레와 교회가 세워진 이래 수세기가 지나면서 화재나 지진, 사람의 손에 의해 여러 차례 전면적이거나 부분적인 파괴가 있었다. 에디쿨레가 마지막으로 재건된 것은 1808년 대화재가 발생한 뒤였다. 최근에는 영국령으로 있을 때인 1927년에 지진이 발생한 뒤 건물이 약해져 강철 지지대가 설치되었다. 이 지지대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데, 조만간 에디쿨레를 대폭 재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성묘교회를 관장하는 그리스도교 종교계의 허가를 얻어 그리스도의 시신이 있다는 그 무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조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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